새벽까지 재밌는 것들을 하다가, 느즈막히 일어나 눈 뜨자마자 밥먹고 집정리를 했다.
일을 하면서 집안일도 같이 하는 게 쉽지가 않아서 나 혼자 정한 룰이 있다. 빨래는 재깍 말리되, 개는 것은 좀 게으르게 하기. 그런데 오늘따라 그 꼴이 보기에 영 너저분하여 앉아서 빨래를 착착 개고 옷장 서랍들을 정리했다.
서랍장에 작년 2월부터 5월까지 쓴 일기가 있었다. 너무 예쁘게 꾸며놔서 왠지 아까운 마음에, 본가에서 나올 때 챙겨나온 것이다. 정리를 끝내고, 앉아 일기를 읽어보니 1년 6개월 전의 내가 놀랍도록, 너무나 애새끼라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아 길게 읽지 못하고 그냥 덮어버렸다. 단순히 문체나 내용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고방식, 무엇엔가 계속 얽매여서 놓지 못하는 것들, 망상, 낮은 인식, 그리고 매일매일 지루하고 고통스런 자아성찰을 통해 기름기를 뺀다고 잔뜩 뺐지만, 여전히 비대한 자의식.
작년 하반기에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7월경부터 해서 12월 끝 까지, 내내 다이내믹했다. 이상한 인간들을 만났고, 기이한 일들에 얽혔다. 살면서 참 제정신 아닌 인간들 많이 봐 왔다 자부했지만, 그것과 또 장르가 다른 희한한 인간들이었다. 나중엔 수치스러웠다. 어떻게 내가 이런 수준의 인간들이랑 엮였다니? 이렇게 사회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최소한의 선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인간들이랑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일을 해보려고 했었다니?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 그게 내가 늘 가지고 있는 신념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사람들이랑 한 때나마 어울렸단 것 자체가 너무 소름끼치고 수치스러웠다. 그런데 일기를 읽다보니, 왜 그리 됐는 지 알겠더라. 그냥 내가 그럴 만한 인간이어서였다. 내 수준이 그냥 딱 고만고만해서, 그 사람들이 군침흘릴 만한 것을 갖고 있었는데 그걸 그들로부터 지키고 그들을 경계할만큼 지혜롭지 못해서였다.
늘 말한다. 모든 것은 다 자기 카르마 레벨에 맞춰 간다고. 그 좋고 귀한 가르침을 읽고 듣고 배워도, 자기 수준이 그에 맞지 않으면 그 무엇도 건져가지 못한다.
올 해는, 지난 9개월간, 참 많은 것들을 배웠다. 지혜라고 할 만한 것을 쌓았고, 타인을 포용하는 법도 배우고 놓아주는 법도 배웠다. 지금은 소유에 대한 것을 배우고 있다. 인간이 존재보다 소유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곧 답을 얻을 것이다. 소유하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잊고 사는 많은 소중한 감각들에 대한 것이라던가, 그 소유욕이 어디서 왔고 또 무엇을 향해 가는가에 대한 것이라던가, 소유한다는 것의 무상함 등등, 배울 것이 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이렇게 배운 것들이 참 많다. 부모자식이라고 하는 관계의 어려움을 어떻게 다루고 풀어갈 것인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내가 욕망하던 것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등등.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답을 어떻게 끌어내느냐가 문제였던 것이지.
올 초에, 한 1-2년간 성장을 멈추었던 영성을 어떻게든 깨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영혼이 성장하면 의식이 성장한다. 내가 한 단계 올라서는 순간 의식이 확장되며, 어떤 정묘한 것들을 깨치게 되며 여태까지 사람과 관계와 사물과 세상을 대하던 본인의 태도와 감정이 피상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본질이란 것, 진리라고 할만한 것이 그렇게 멀고 아득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란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고,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있었던 마음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게 되며 어떻게 놓아줄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 삶이 쉬워진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저 왔다가 가는 것이고, 나에게 영원히 머물거나 나의 본질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되고, 그러면 이제 고통을 그저 고통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상처받지 않게 된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영성에 관해 진지하게 논할 수 있는 친구들, 늘 함께 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 영존재들, 나의 안식처인 여신님, 기도와 수행으로 가르침을 구하면 아낌없이 가피를 내려주시던 불보살님들 등등. 나 하나 잘 살 수 있는 것이 다 나 혼자만의 덕이 아님을 늘 느끼고 있다.
여하간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의미있었고, 유익했다. 내가 살아 가야할 방향으로 우주가 불을 밝히며 인도해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 그 길 끝에 내가 무엇이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괜찮다는 확신이 이제는 선다. 내가 '나'라는 상에 집착을 하고 있어서 그간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부지런히 가야지. 뭐 어쩌겠어. 요새 블로그에 글을 안쓰는 이유는, 길게 쓰다보면 사안이 자체적으로 알아서 해결이 되거나 그냥 써본 것 만으로도 표현해야겠다, 써봐야겠다는 욕구가 다 풀려버려서. 굳이 세상에 내어 놓아서 정화거리 늘릴 필요도 없고 해서 그냥 쓰다 말아버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고, 지금도 여기까지 쓰고 나서 그냥 올리지 말아버릴까 살짝 고민이 들지만, 일단 내 여정에 책갈피 하나 남기는 셈으로 끝까지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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